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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쿠테타였다 글의 상세내용 :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질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쿠테타였다
작성자 신** 등록일 2024-02-16 조회 97
첨부 mp4파일 첨부 올인_처음 그날처럼-박용하.mp4(9.45MB) 미리보기
[서울의봄]이라는 영화가 인기가 많았었다고
합니다. 저는 관람하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없었지만 구태어 시간내서 볼 가치가 있을까 해서입니다. 폭력은 그 무엇이로도 합
리화가 안되는 것처럼 쿠테타 역시 반역이고,
그 당시엔 정당하고 국민을 위한 것이였더라도
훗날 반드시 후대 사람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
히 받게 된다는 점에서 절대 합리화 될 수 없다
고 봅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 역시 쿠테타로
왕조를 세웠고, 지금 우리는 그자의 객기때문
에 이 고통속에 살고 있기에 함께 아픔을 나누
고져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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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수복의 기회를 날려버린 이성계의 쿠데타

작성일2021.08.29.(퍼옴)

더 이상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을 펼치지 못한 채, 우리 강토를 한반도에 움츠러 들게 만든 당시의 불행한 사태는 두고 두고 아쉽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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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도했다.

이는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요동이 고
구려, 더 나아가 고조선의 옛 강역으로서 동이의 땅임을 천하에 알리고 인정받기 위한 군사 작전이었다.

당초 요동원정군 사령관에 도원수 최영이 임명됐으나 우왕이 최영의 출전을 만류하므로
써 결국 제1 부원수였던 이성계가 병권을 장악
하고 말았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쿠데타를 일으켜 우왕과 최영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명나라 신
하를 자청해 나라 이름까지 지어달라는 굴욕적
인 저자세를 취함으로써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성계가 내세운 4불가론은 쿠데타에 대한 자
기 변명으로 해석할 수밖에 있다.
고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위임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권한을 위양할 때는 그 권한이 잘못 행사될 경우 조직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따져야 한다.

이런 실패의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까닭은 비
슷한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4불가론의 맹점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 정벌군의 지휘권을 갖게 되자 이를 정권 탈취의 다시없는 기회로 판단해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개경을점령했다.

이때 위화도회군의 명분으로 ‘4불가론’을 내세워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다음에서 ‘4불가론’이 왜 이성계의 자기변명에 불과한지 그 내용을 하나씩 뜯어보자.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첫 번째 주장은 요동 정벌의 성격을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 요동 정벌은 명나라와 전면전을
하자고 대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 땅을 찾
고 주변 민족과 중국에 인정을 받겠다는 목적
이 우선이었다.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고려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도 충분했다.
1370년 공민왕 때 요동성을 거의 무혈 입성으
로 점령했었다. 원나라 지배 시기에도 요동을
다스리는 심양왕에 반드시 고려 왕족을 임명했
고, 1345년부터 1351년까지 6년간은 고려왕
이겸직했다. 당시 요동 지역에서는 요동을 고
려가 차지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적었다.
공민왕의 요동성 점령 시에는 수많은 요동 거
주민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내응하기도 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1388년 북경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원나라가 몽골 초원 지역에 여전히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에
킵차크칸국, 차가타이칸국과 같은 몽골 계통왕
국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새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명의 주원장 입장에서는 요동을 향한 고려의 군사행동을 저지할 실익도, 명분도,여력도 부
족한 상태였다. 주원장은 북경을 점령하기 전 1387년 강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
했는데 강계에 온 명나라 군대는 1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주원장에게 군사 운용의 여유가 충분하
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원장 입장에서
는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고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요동이 우
리 옛 땅이라 되찾은 것이라고 정중하게 설명
하고 명과 조공 관계를 맺겠다고 해도 주원장
은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전이 조선 건국 후 명나라가 조선을 심하
게 몰아붙이자 요동 정벌을 주장했던 것도 첫
번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2. 농번기에 거병하는 것은 백성에게 불편하
다.
-두 번째 주장은 고려판 정치 포퓰리즘 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을 개시하는 데 농번기는 결정
적인 고려 요소가 아니다.

적군의 움직임과 준비 상황, 아군의 비교 우위 등을 고려해 개전 시점의 합당한 타이밍을 정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농번기 운운하는 것은 베
테랑 무장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새로운 지도자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정치 구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3. 요동 정벌 기간 중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어렵다.
-세 번째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과 맞
지않다. 왜구가 대규모 병력을 상시 대기시키
는 것도 아니다. 또 침략을 하려면 바다를 건너
와야 하는데 요동 정벌로 인한 빈틈을 보고 공
격하기엔 군사 모집, 군수물자 확보, 수송선 마
련에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사이에 요동 정벌이 종료될 가능성이 커서다
게다가 우왕은 요동 정벌군을 편성할 때 경기
도 병력을 제외함으로써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
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한편 왜구는 1380년 최무선의 화포가 맹
활약한 진포해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난 뒤 고려 수군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 번째 주장은 백성들이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한 정치 선전으로밖에 보이
지 않는다.

4. 장마로 활의 아교가 풀어져 활을 쏠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주장도 논거가 약하다.
국운을 건 전쟁을 두고 날씨 탓을 한다는 게 왠
지 어색하다. 활이 젖지 않게 관리하거나 젖은
활을 말리는 방법이 없었을까. 또 우리가 활을
쏘지 못하면 적군도 쏘지 못한다.
전투력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악천후가 이유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성계는 행군 속도를 느리게 가져가며 장마철을 오히려 기다린 정황이 있기에 설득력
이 더욱 떨어진다. 평양을 출발한 원정군은 평
양에서 신의주까지 200㎞를 20일을 걸려 하
루 평균 10㎞의 속도로 행군했다.
우왕이 수차례 파발을 보내 장마가 오기 전에 압록강을 건너라고 재촉했지만 아랑곳하지 않
았다. 신의주에 도착한 후에도 비가 오길 기다
렸다가 압록강이 불어난 후에야 빈약한 도하
장비로 강을 건너다 병사들이 빠져 죽고 군심
이 동요하자 군사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위화도회군 후 진군 속도는 4배로 빨라
졌다. 신의주에서 개경까지 400㎞를 단 10일
만에 주파(하루 평균 40㎞)하는 기염을 토했다



❏ 위화도회군은 명분없는 쿠데타?
우연적인 요소가 역사의 흐름과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군사학에서는 이를 힌지 팩터(Hinge factor)라고 한다.

위화도회군에도 힌지 팩터가 있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군 사령관에 장인인 최영을 임명한 후 마음이 바뀌었다. 갑자기 불안감을
호소하며 최영에게 개경에 남을 것을 종용했고
최영이 마지못해 개경에 남자 제1 부원수인 이성계에게 병권이 넘어갔다.

우왕과 최영은 군대와 멀어진 장군은 무력한 존재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명령을 어기고 개경으로 들어온 반란군은 장군
사병 할 것 없이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될까
두려워하고 존경하던 최영까지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요동 정벌군 사령관 교체라는 의사결정을 힌지 팩터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갑자기 우
왕이 이유 없는 불안감을 호소한 것은 우연적
요소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우왕과 최영은 안이했고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
했던 측근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만일
이때 우왕이 이유 없는 불안감을 호소하지않았
다면 최영이 출정해 요동을 접수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의 강역과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위화도회군은 역사의식을 망각한 권력 추구 집
단이 주도한 명분 없는 군사 쿠데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화도회군이 사전에 기획된 쿠데타라는 점은
이성계 가문의 사병 집단이 이상한 행보를 보
였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 함께 따라다니며 큰 활약을 하던 약 2000명의 사병 집단은 요동 정벌에 참여하는
대신에 개경으로 침투해 원정군 장수들의 가족
을 관리했다.

이성계의 회유에 원정군 장수들이 가족의 안위
까지 고려해 회군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을 만든 것이다. 특정 집단이 민족의 염원이 담
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 영토를 회
복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

​사대주의 조공 외교를 국시로 해 중국에 예속
된 제후국을 스스로 선택한 왕조인 조선은 고
구려를 계승해 고구려 고토 회복을 추구한 고
려에 비해 자주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보다 훨씬 더 교조적인 유교 질서를 강조
하고 사농공상이라는 엄격한 신분 질서를 내세
운 것은 사회계층의 상향 이동성을 억제해 사
회의 역동성을 낮추고 인재의 풀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농공상 신분 질서는 공업
과 상업에 종사하는 인력을 천시함에 따라 기
술의 개발, 축적, 상용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또 해금 정책은 농토가 부족한 반도 국가가 무역 활동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는 길을 원천 봉쇄했다.

조선의 새로운 질서가 고려에 비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할 방도를 찾기 어렵다.

​원명 교체기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이성
계 일파의 책임이 크지만 우왕과 최영의 책임 또한 적다고 할 수 없다. 민족의 운명을 건 대
사를 앞에 놓고 우왕과 최영이 내린 결정은 너
무 감성에 치우쳤고, 이들은 사람을 지나치게
믿었다.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출정을 앞둔 장수,
고려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수이자 스스로도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던 장수를 도성 내에 붙잡아버린 우왕의 나약한 처신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그리고 우왕을 달래지 못한 채, 고려의 병권을
손쉽게 이성계에게 넘겨버린 최영의 판단도 마
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렵다.

​조직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냉철한 이성과 판단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 하
지 말고 객관적인 위험 평가에 입각해 가급적 직접 챙기도록 해야 한다. 특히 권한을 위양 할
때는 위양된 권한이 지나치게 큰 나머지, 이 권
한이 잘못 행사될 경우 조직 전체가 무너질 가
능성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하는 목소
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에게 지나치
게 큰 권한을 위임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이성계를 경계할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너무 단순하게 일을 처리해서다.

예를 들어 문관인 정몽주를 최영을 대신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성계를 1군 사령관
조민수를 2군 사령관으로 대등한 지위를 갖도
록 편제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우왕과 최영은 권한 위양과 관련된 위험을 관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326호

필자 한미협회장 최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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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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